연휴는 다가오고…

갑자기 폴란드가 가고 싶어졌다…

요 근래 그 곳에 대한 몇가지 에피소드들이 독립적으로 거쳐갔다.

첫번째씬,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한 날 들른 스트릿 마켓에서

우연히 로자 룩셈부르크의 초상과 이름이 적힌 전단지를 보았다.

체 게바라의 고향답다는 생각을 잠시…

두번째, Las Campanas 관측을 갔을 때, 3주째 관측 중이라 제 정신일리 없을

지나치게 붙임성 좋았던 폴란드 친구.

세번째, 정은임의 영화음악 중에 올드보이 정성일이 예의 그 말투로

크쥐스토프 키에슬롭스키의 십계, 삼색영화 그리고 범작으로 알려진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

대해 나즈막히 읇조리듯 얘기할 때.

마지막, 임지현의 글에서 로자에게 보내는 편지.

시골 한 도시에 덩그런 간판만이 그녀의 생가를 알리고 있다는 글을 보고 랭보의 그것이 떠올랐다.

 

오랜 기억,

언어 관련 수업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즐겼던 적이 있는데,

독일에서 미학을 전공햇던 그 강사는 자신에게 대뜸 반말을 했다는 이유로

(비록 실명을 대지는 않았지만) 황석영을 지극히 싫어했고,

초급 독어였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문법이나 회화따위는 가르치지 않았다.

로자의 그 유명한 문구를 독어로 쓰라는 것이 그의 시험문제 1번이었다.

Freiheit ist immer die Freiheit des Andersdenkenden
-Rosa Luxemburg

강렬한 책읽기

책을 읽는 또 다른 방식은 책을 어휘나 의미를 찾는 것과는 무관한 하나의 기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작용을 하는가, 어떻게 작용을 하는가’ 하는 것만이 문제가 된다.

그것이 어떤 작용을 하는가? 만일 작용이 없으면, 감응이 없으면, 그럼 다른 책을 집어 들면 된다.

바로 이것이 강렬한 독서이다.

무엇인가 발생하든가 아니면 아니든가, 그뿐이다.

아무런 설명할 것도, 이해할 것도, 해석할 것도 없다.

-들뢰즈 (강신주의 책에서 재인용)

영혼

의식하든 하지 못하든 누추한 일상에서는 ‘인간에 대한 예의’ 그 이상으로 사람을 대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에 내 ‘영혼’이 상처를 받을 지는 몰랐다.

말은 물론이고 글에서도 이 단어를 찾기 어려운 시대다.

처음으로 ‘영혼’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글을 보고 눈물이 날 뻔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순결한 영혼. 상투적이라고?
미안하다. 사람을 표현하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
눈에 보이는 영혼을 표현하는 방법은 더욱 많지 않다.

내가 길을 떠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것이다.
순결한 영혼을 만날 수 있는 확률이 높다는 것.
집에서는 순결한 영혼을 만날 수 없느냐고?
물론 만날 수 있다.
확률이 낮을 뿐이다.

왜 확률이 낮아져야 하느냐고?
먹고 살기 위해서 약아지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영혼 같은 건 잠시 잊어야 살 수 있기 때문에.
내 영혼이 먼저 너저분해져 있기 때문에

-조병준

점심시간

뉴욕에서 목수를 하는 그의 사진은

대게 사진 아래 절반 쯤은 길로 텅 비어져 있는데 (소실점이 높다고 해야하나…)

그 허전함과 (배경처럼) 돌아서 있는 인간들, 그리고 설거운 도시외곽의 단면들이 참 잘 어울린다.

나같은 아마추어는 보통 그 여백을 견디지 못하고 뭔가 집어넣을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자주 너무 많은 것을 사진에 넣게 된다.

책의 표지그림은 그런 의미에서 참 좋은데,

익숙하지 않은 빈자리를 빛이 완연하게 메워주고 있다.

새로운 직장에서 일을 시작한 후 4년 정도 작업한 것들이 형이 보신 나머지 것들이겠지요.

그 4년 동안 (지금도 그렇지만), 점심을 먹고 나서 남는 시간 동안, 거의 매일, 공장 주변을 돌아 다녔어요.

많은 상념 속에 카메라르 메고요, 특별하게 어떤 장소를 찾아 다니지는 않았고, 그저

주어진 시간 내에 가능한, 공장 주변 한바퀴, 출퇴근 시간에도 사진을 찍었지만 중요한 작업은

점심 후 30분의 시간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명료한 오후’ – 서영기

하릴 없는 점심 시간,

미국에서 조금은 외롭게 살면서 늘 기다렸던 그 시간이다.

그 길었던 침묵의 시간을 거치고 이 곳에 돌아오니

떠나기 전보다 말수가 엄청 늘어버린 내 자신이 여전히 낯설다.

동사무소 무인 발급기에서 증명서를 떼고 한적한 커피숍에 들러 샌드위치를 먹었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에 이런 비슷한 장면이 있엇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김연수의 책을 읽고 있다.

이상하리만큼 글이 쓰고 싶어졌다.

아마 내 필력이 보통 사람 평균 수준만 되었어도 아마 시집하나 장편 소설 하나 쯤은 썻을 것이다.

 

야심한 밤 축구가 끝나고 잔디밭에 누웠는데

그물 넘어 저 어두운 하늘 속 그저 두어 개의 별 만이 보일 뿐인데 한없이 아득하다.

축제가 한창인 대학교정 저 멀리 어느 곳에서

푸른하늘의 오래된 노래가 합창으로 들려온다.

중학교 시절 버스를 한 시간 쯤 타고 다니던 외숙모가 운영하던 학원에서 난 사춘기를 맞았던 것 같다.

지금은 얼굴만 설핏 기억나는 친구 녀석이 푸른하늘을 참 좋아했었다.

학원 앞 분식점에 그닥 특별하지 않은 라면을 팔았는데, 여태 그보다 맛있는 라면을 찾지 못했다.

생파가 살짝 올라간 그 라면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 학원을 오가던 버스 안의 풍경들, 그 길 위의 감정들이 내 삶의 절반쯤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연은 참 힘이 세다…

모든 인간은 하나의 책을 쓰기 위해 태어났다.

- 아고라 크리스토프

봄이야기

지금 내가 사는 동네는 도시의 끝자락 같은 곳이다.

아파트가 끊임없이 자기 증식을 하다가 결국 한계에 맞닥뜨려 더 이상 갈 수가 없는 곳,

아니 좀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도시민들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곳이다.

음식점은 생겼다 없어졌다를 반복하고,

뜨내기들이 3평 남짓 원룸에서 젊음을 소비하는 그런 곳이다.

 

집앞 가끔 혼자 들르는 국밥집이 있는데,

엉뚱하게 이 곳에 떨어진 듯 한 사람들이 가끔 술을 마시고 가기도 한다.

늦은 일요일 저녁엔 대게 손님이 없는데, 그래서 유독 옆자리 남녀의 대화가 또렷히 들린다.

역시 그들은 국밥을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여자가 고백하듯 남자에게 말을 한다.

‘나는 너가 봄꽃처럼 좋아, 이 모든 만물들 처럼…’

남자는 그 상황이 어색한 듯 말을 돌린다.

가끔 현실이 영화보다 더 영화스러울 때가 있는데 바로 그 순간이 그랬다.

홍상수의 영화도 조금 생각났고, 허진호의 초기작들도 문득 떠올랐다.

또 왠지 봄 이야기를 하니 지금은 세상에 없는 에릭 로메로가 보고 싶어졌다.

 

한 소설가는 삼청동 돌담길의 피어오르는 봄꽃의 모습을 보고 눈물이 날 것만 같았고,

그래서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단다.

아무렴, 봄꽃의 아름다움을 글로 옮기고 싶었다는 그런 이유 따위는 아니고.

‘마치 본인이 투명인간처럼 새상 어느 곳에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된 것처럼 느낀 이유’에서란다.

 

비와 함께 (부끄러움을 채 느낄새도 없이) 이미 봄은 저만치 멀어진 느낌이다.

애잔함

참으로 오랜만에 평일 서울 중심가를 걸었다.

낯설기로 따지자면 지난 15년(그렇다 15년이다)이 그랬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잘 빼어입은 사람들의 점심 경로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조금은 생소하다.

(이제 백수 후배의 심정을 1%쯤 이해한다는 말은 안할련다…)

 

‘폭력’에 관한 영화를 보았다. (‘그녀가 떠날 때’)

언뜻 배경과 소재의 (약간의) 엇비슷함 덕분에, 파스빈더의 옛 영화가 떠오르기도 했는데,

그 옛 영화가 거리두기에 주안을 두었다면,

이번 영화는 (이국의 언어들이 무색하리만큼) 보는 이의 이입을 권한다.

그런 의미에서 약간 신파스러웠지만, 그런 약점 따위를 덮고도 남을만큼  영화는 좋았다.

‘그을린 사랑’과 지난 부산영화제 때 보았던 한 영화처럼 소재와 주제의 진부함이

영화의 진부함으로 이어지지 않는 훌륭한 예였다.

 

마침 광화문 앞에서 녹색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새마을’ 운동을 하고 있다.

그렇다, 새마을 앞에 ‘신’이나 혹은 ‘뉴’를 빼버려도 될 만큼 뻔뻔한 시대가 된 것이다.

(영화의 배경인) 터키와 한국, 과연 형제의 나라답다.

 

김연수의 이번 소설은 좀 별로였다. 보통 김연수의 초기작을 좀 더 좋아하는 편인데,

오늘 문득 그 이유를 깨달았다. 바로 애잔함 때문인 것을.

그래서 좀 길게 그의 글을 인용해본다.

어느 날 갑자기 글을 쓰기로 결심하고 한쪽 구석에 앉아 글을 써내려가는 장면을
상상할 때 어떤 애잔함 같은 것을 떨칠 수가 없다.
누군가 그런 소설을 가리켜 ‘키친 테이블 노블’이라고 말했다.
식탁에 앉아서 쓰는 소설이란 뜻인데, 전문적인 소설가가 아니라
일반인의 처지에서 쓴 소설이 크게 인정밨았을 때 붙이는 이름인 듯하다.

키친 테이블 노블이라는 게 있다면, 세상의 모든 키친 테이블 노블은 애잔하기 그지없다.
어떤 경우에도 그 소설은 전적으로 자신을 위해 씌어지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스탠드를 밝히고 노트를 꺼내 뭔가를 한없이 긁적여 나간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직장에서 돌아와 뭔가를 한없이 긁적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지만 긁적이는 동안, 자기 자신이 치유받는다.
그들의 작품에 열광한 수많은 독자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키친 테이블 노블이 실제로 하는 일은 글을 쓰는 사람을 치유하는 일이다.

그건 그렇고, 그렇다면 나는 치유받았을까?
글쎄. 그 지루했던 봄과 여름을 별다른 고민이나 사건없이 보낸 것만은 사실이다.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에서

Chiloe

수많은 신화와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이 곳은,

결국엔, 내게도 가장 미스터리한 곳으로 남았다.

형용하기 힘든 불안으로 여행은 시작됐고 그 감정은 금새 현실에서 실현되고 말았다.

흔한 길이었다면, 거기서 끝이었을 것이었다.

 

가장 아름다운 사진들을 얻었고, 그리고 평생 잊지 않을 이방인의 도움을 받았다.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한쪽 가슴이 아리고, 지진에 타버린 강하구의 비현실적인 풍경이 떠오르는데,

살아생전 다시는 마주하지 못할 그 이미지가 100일이 지난 지금도 좀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누구 말처럼 한국의 현재 날씨는 너무 좋다. 봄꽃은 만개했고 거리에 활기는 가득한데.

좀체 여기서 한발짝도 더 나가지 못한다.